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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이상만 알 수 있는 것:김밥 젠장

by kiki3304 2025. 4. 18.

 

실직 127일 차.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내가 말했다. “오늘 점심은 당신이 알아서 좀 해봐. 냉장고에 김밥 재료 넣어놨어.” 김밥? 김밥이 뭐라고. 나도 한때는 **팀장급 리더십으로 프로젝트 8개를 굴리던 남자다.** 김밥쯤이야.

오전 11시 30분. 달걀을 깨고, 햄을 썰고, 단무지를 꺼냈다. 시작은 그럴싸했다. 칼도 곧잘 잡았고, 달걀도 터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이었다.

 

김이 문제였다

도마 위에 김을 깔고 밥을 얹는데, 밥이 자꾸 김 위에서 흩어진다. “밥이 좀 식어야지 잘 펴지지.” 아내가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이미 나는 식은 밥이고, 식은 김이다.**

밥을 펴고 단무지, 햄, 오이, 계란을 나름 예쁘게 올렸다. 그리고 돌돌 말았는데… 김이 찢어졌다. 두 번째 시도, 말다가 재료가 옆으로 삐져나왔다. 세 번째 시도, 끝까지 말았는데 김이 풀렸다.

순간 **욱** 했다. 내가 왜 김밥한테 지고 있는 건가?

쌓이는 건 김밥이 아니라 분노

식탁은 난장판이고, 손엔 밥풀이 붙어 있고, 입가에선 욕이 삐죽 튀어나오려는 찰나. TV에선 요리 유튜버가 웃으며 말한다. “누구나 쉽게 만드는 김밥!” 아니, 누구나가 아니고, 나만 아니야.

난 김밥을 말고 있었는데, 김밥은 나를 말고 있었다. 내 자존심, 내 분노, 내 무력감까지 싸서 꽁꽁 말더니 **결국 그 자리에 눕혀버렸다.** 난 식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점심 먹었어?”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 점심은 김밥 했어?” “어… 했지.” 말은 했지만, 사실 그건 **김밥의 형상을 한 탄식덩어리**였다.

아내는 “사진 보내봐”라 했다. 순간 숨이 막혔다. 어찌어찌 잘라서 접시에 놓고 각도 조절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조금 무너졌는데 맛은 있어.”

그때 깨달았다. 나, 지금 **김밥에 체면 차리는 중이다.**

그래도 먹긴 했다

허무하게 생긴 김밥을 입에 넣었다. 망가진 모양과는 달리 맛은 나쁘지 않았다. 김밥 하나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인생도 이렇게 찌그러졌어도 먹고살긴 하잖아.”

김밥 한 줄에 내 자존심이 말려 있었고, 식탁 앞에서 나는 중년 남성이자 초보 주부였으며, 인생이라는 조미료가 오늘은 유독 짭쪼름했다.

마무리하며

김밥은 쉽지 않다. 특히 인생이라는 재료가 너무 많을 때는 더더욱. 그래도 말아야 한다. 터지든, 찢어지든, 흘러내리든.

오늘도 나는 김밥 한 줄을 입에 넣으며 다짐했다. “내일은 조금 덜 터지겠지.”

#50대실직일상 #김밥의분노 #웃픈중년 #김밥전쟁 #중년의자존심